2007-05-15
가난한 몽골 사람들의 천사, 박혜선
몽골 기행 2 : ‘몽골 국립요양원’에서 만난 박혜선 간호사님의 이야기

15일 소개했던 몽골기행 1편 '우리는 몽골의 진정한 '무지개'일까?'에 이어 ‘몽골 국립요양원’에서 일하는 한국 국제교류재단 코이카(KOICA) 소속 박혜선 간호사님의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그는 지난해 여름부터 이 곳에서 의료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래는 15일 소개했던 1편입니다.

▷ 몽골 기행 1 : 우리는 몽골의 진정한 '무지개'일까?

△몽골 국립요양원.


몽골 국립요양원 건물 모습입니다. 30여전 전에 지어졌다는데 단 한번의 수리공사도 없었던 것처럼 흉측했습니다.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건방지게도) ‘죽음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 곳에 사는 분들은 낯선 이방인들을 향해 ‘사인 배노(안녕하세요)’를 외치며 손을 붙잡으며 친근감을 표시해주더군요. 사진 촬영도 적극적으로 임해주셨는데, 아마도 그간 굉장히 외로웠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오지에 한국 분이 계신 겁니다.(세상에나~!)

바로 국제교류재단 코이카(KOICA) 소속의 박혜선 간호사님이 지난해 여름부터 이 곳에서 의료지원 활동을 벌이고 계셨습니다. 이 분은 2년간 이 곳에서 몽골 분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갖가지 의료혜택을 전해주기 위해 이 곳에서 벌써 1년째 체류 중이었습니다.





이것 저것 여쭈어 보니 이곳 요양원의 몽골 분들의 삶과 박 간호사님의 봉사활동이 너무나 애틋하게 느껴지더군요. 2005년 초, 그가 몽골 KOICA 사무실에 보냈던 편지를 어렵게 단독입수(?)하여, 아주 조심스럽게 도깨비뉴스 독자들에게 공개하고자 합니다. 전 세계에 퍼진 코이카 단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편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바트숨페르 ‘몽골 국립요양원’에서 온 편지




어제는 바트숨베르의 하늘이 잔뜩 흐렸습니다. 전날 밤에 두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이곳에서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도 돌봐 줄 이 없어 이곳으로 왔으니 여기서 돌아가시는 일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다 압니다. 언젠가 사람은 죽을 거란 걸. 그럼에도 죽음은 언제나 슬프고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돌아가셨으니 친구해서 가셨다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조금 가슴 아픈 점도 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는 머리와 어깨, 그리소 손에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거동이 불편해 계속 누워계셨는데, 담배를 피우시다 그러셨답니다.

그런데 이곳 간호사 말이 여기에는 소독약이 없다는군요. 제게는 코이카(KOICA)에서 지급한 개인용 응급약 세트가 있었습니다. 1인용이기에 많지 않았지만 급하게 치료할 정도는 됐습니다. 이후 몽골에 있는 코이카 단원 모두의 소독약을 수거해 왔습니다. 단원들은 서슴없이 자신들의 소독약을 제게 주었습니다. 치료를 해 드리니 고통이 극심할 텐데도 내색도 안하고 오히려 반기더군요.

한국에서 온 제가 치료를 해 주면 금방 나을 것 같았나 봅니다. 상처는 그렇게 크지도 깊지도 않았기에 그 상처 때문에 돌아가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돌아가시기 전 고통을 느꼈다는 것이 몹시 가슴이 아픕니다.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





여기는 울란바타르에서 약 80km 떨어진 바트숨베르라는 마을입니다. 기차역은 만달이라는 역입니다. 기차역에서 약 8km 떨어진 조용한 산 밑에 우리 요양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몽골에서는 단 하나밖에 없는 국립 요양원입니다.

약 150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고 직원은 약 50명 정도 됩니다.

이 근처 주민은 약 300명 정도이고, 조그마한 초등학교도 있습니다. 4학년까지는 여기서 다니고 5학년부터는 군 소재지에 해당하는 만달역 근처까지 나갑니다. 여기 아이들은 도보로 1시간30분 걸리는 학교를 모두가 걸어서 다닙니다. 주민들도 울란바타르에 갈 때면 역까지 걸어나가 기차를 탑니다.

300명 주민 가운데 50명이 이 요양원 직원이기 때문에 모두가 요양원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여기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분들은 여러 모로 다양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립 요양원은 몽골에서 이곳 한 곳뿐이니까요. 고령자,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정신지체장애인, 정신장애인, 신체장애인 등 온갖 종류의 장애인은 모두 모여 계십니다.연령층도 19세부터 90세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3층 건물의 1,2층은 그나마 스스로 생활이 가능하신 분들이 계시고, 3층은 거동이 불편하시거나, 누워서 대소변을 보시는 분들로 약 오십 분이 계십니다.

거동이 불가능해 식사에서 대소변까지 봐 드려야 하는 분들도 십 여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근무자는 간호사 1명에 보모 2명 총 3명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24시간 교대 근무를 해야 하지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그리고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일합니다. 3명이 50명을 돌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매우 힘든 일입니다. 대소변을 가리는 일이 가장 힘이 듭니다. 일회용 기저귀는 물론 없습니다. 그냥 일반 천을 씁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분들을 돌보는 일은 끝이 없습니다.





요양원 건물은 약 20년 전에 지었습니다. 여기 저기 낡아서 수시로 고장이 납니다. 우리 방에는 비가 옵니다. 건물이 새는 탓입니다. 오래된 건물인 탓에 시시때때 여기저기 고장도 납니다.

여기 와서 이틀째 되던 날에 화장실 천장에서 물이 샜습니다. 한번은 제가 실수로 전열기구 2개를 한꺼번에 켰다가 전기가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꼭 하나씩 만 사용합니다.

저녁에 퇴근 후 요양원 내에 있는 숙소로 돌아오면 정말이지 할 일이 없습니다. 컴퓨터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고, 옆집 친구도 없습니다. 어두워지면 무서워서 밖에도 나갈 수 없습니다. 개가 많은 까닭입니다. 집집마다 두세 마리씩 있는 개들이 그냥 돌아다닙니다. 개가 상당히 크기에 위험해 보입니다. 실제로 며칠 전 이곳 의사가 개한테 물려서 치료를 해 드렸습니다.

이 곳에서는 흔할 일이랍니다. 글쎄요, 개들은 예방 접종도 안 한 것 같습니다.

하기야 사람 예방 접종도 힘든 곳인데요.





요양원 직원들이 가끔 내방에 놀러 오기도 합니다. 저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외국인이 이곳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들어와 사는 건 처음이랍니다. 어떻게 사는지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한국 물건이라면 무조건 좋다고 합니다.

가습기 안 가져온 게 다행입니다. 가습기는 다른 단원들 이야기가 그건 울란바타르에 있는 사람들도 신기해 했답니다. 저는 안 샀습니다. 건조하긴 해도 적응해 보려고 합니다.

가끔은 코에서 피가 나기도 합니다만 적응이 된 것도 같습니다. 밥은 제 방에서 혼자 해 먹습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울란바타르에 나가면 짐을 지고 들어 와야 합니다. 여러 가지 살 게 많아서요. 혼자 사는데 왜 이렇게 필요한 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여기는 뜨거운 물이 안 나옵니다. 물론 샤워도 못 합니다. 울란바타르에 나가야 목욕을 할 수 있습니다. 화장실에는 변기 하나, 세면대 하나 뿐이고 부엌에는 물이 없습니다. 설거지도 화장실에서 합니다. 커피포트에 물 데워서 고양이 세수 한 후 수건에 물 적셔서 몸 대충 닦습니다.

그래도 이 요양원에서는 제 방이 제일 좋은 방입니다. 원래는 방 3개가 손님방이랍니다. 여기에 면회 오거나 손님이 오시면 근처 숙박 시설도 없고 해서 손님방이 있답니다. 그 중 하나가 제 방입니다.





뜨거운 물이 안 나오다 보니 여기 계신 분들 모두 겨울에는 목욕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 와서 제 소원 하나가 정해졌습니다. 이곳에 뜨거운 물 나오는 목욕탕 하나 만들었으면 합니다. 아마 코이카 봉사단 프로젝트 사업으로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건물도 지어주고 싶지만 그건 꿈일 뿐입니다.

꿈은 이루어지나요? 제가 만약 못 이루면 누군가 내 꿈을 이루어 줄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는 여기 꼭 다시 와 보고 싶습니다.

저는 간호사입니다. 흔히들 백의의 천사라고 불립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 수식어는 곤혹스럽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착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분들을 만나보신다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뭔가는 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

빨래도 제대로 못해 입고 아마 겨우내 같은 옷을 입고 계신 것 같습니다. 방도 그리 따뜻하지는 않은 까닭에 5~6개씩 껴입고 계십니다. 석탄은 열심히 때는데 시설이 오래 돼서 그런가 봅니다. 얼마 전에 김혜자 씨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분이 가신 곳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다는군요. 여기서는 그나마 (정부가) 식사는 주는 덕에 굶어 죽지는 않습니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까요?





미용사도 와서 머리도 깎아 주곤 합니다. 이가 아프면 몇 달에 한번 오는 치과의사가 상한 이를 빼고 갈 뿐입니다.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약도 없습니다. 이렇듯 제도는 너무나 잘 돼있지만 물자가 없을 뿐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삭발한 분들이 많습니다.

잘 감지도 못 할 거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에는 밖에도 나가지 못합니다. 너무나 추우니까요.(영하 –40도까지 내려갑니다) 별 오락거리도 없습니다. 그래도 도서관에 책도 있고, 체스도 있고 가끔 영화도 봅니다.

간혹 카드놀이도 하십니다. 텔레비전도 한 대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제가 지나가면 아픈 곳을 말합니다. 참 많이들 아프십니다. 다 치료 못해드려 정말 미안할 뿐입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아픈 것을 다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치료는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는 그것도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제가 지나가다 엄지를 들어 보입니다.

그럴 때면 더 미안합니다. 여기서는 병에 대한 진단명이 없습니다. 그냥 ‘심장이 안 좋다’ ‘신장이 안 좋다’ ‘속이 안 좋다’ 정도라고 말합니다. 여기는 피검사 할 곳도, 엑스레이 검사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확실한 진단명이 없을 수 밖에요.

제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 원장님이 직원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여긴 무슨 최신식 수술을 하는 병원도 아니고 어차피 요양원이라는 곳이 잘 지내게 해드리는 것이 최상의 간호입니다. 거기에 필요한 건 물자이지 뭐 대단한 지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날이 화창하게 개었습니다. 오늘은 장례식 날이랍니다. 돌아가신 분을 6km 떨어진 곳에 묻으러 간답니다. 제가 함께 가겠다고 하니 다들 말렸지만 그래도 가보기로 했습니다. 트랙터 뒤에 짐차를 달고 관을 싣고 갑니다. 관은 나무로 짰는데 대충 만든 것 같습니다.

가족이 없으신 분들이라 장례식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간호사, 보모 그리고 일하는 사람 7명이 함께 묻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땅을 어떻게 파나 고민했지만 기우였습니다. 이미 여름에 겨울 장례식을 대비해 4, 5개 정도 미리 파 놓았더군요. 그래서 그 곳에 관을 넣고 흙으로 덮고 나면 장례식은 끝이 납니다.

나중에 혹시나 가족이 찾아오면 비석을 세워 드리기도 한답니다.

제가 할 수 일이란 좋은 데 가시라고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염은 몽골 간호호사가 했다는 데 보지는 못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계절입니다. 땅도 건물도 하늘도 모두 똑 같이 잿빛입니다. 봄기운을 머금은 새싹들이 동토를 뚫고 나오듯이 이젠 희망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바트숨베르…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어렵고 가여운 이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은 그런 마을입니다. 날씨가 좀 더 따뜻해 지면 바트숨베르에 오세요.

할아버지 할머니 손잡고 마중 나가겠습니다.

코이카 단원 박혜선




△국제교류재단 코이카(KOICA) 소속의 박혜선 간호사(오른쪽)


이분이 바로 박혜선 님입니다. 언뜻 이력을 여쭤보니, “군에서 간호장교로 복무했고, 사우디에도 다녀왔고 최근까지 서울시 보건소에서 일했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무슨 방랑벽 때문인지 코이카에 자원해서 2년간 몽골로 파견 나왔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대단하시다는 표현 밖에 말이 안 나오더군요.

뜻밖의 만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묵묵하게 세상 한 구석에서 대한민국의 대표선수로 활동하고 계신 분도 계시구나’ 하는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숙연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알게 된 것은 현재 몽골에는 코이카 봉사 단원만 50여분이 박혜선님과 유사한 음지에서 묵묵하게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의사나 한의사 같은 의료진에서부터 농업기술이나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까지 그 활동 범위도 다종다양 합니다.

2005년도 코이카의 몽골 지원액수는 약 250만 달라(한화 약25억원)정도 라고 합니다. 몽골은 150여 개 지원대상 국가 가운데 액수 상으로 10위 권이라고 하네요. 아직도 코이카를 잘 모르시는 분이 계시다면 웹사이트(http://www.koica.go.kr)를 참조하셨으면 합니다.

한가지 배아픈 사실이 있다면 일본의 코이카 격인 자이카(JAICA)의 몽골 지원 액수는 우리의 10배 가량인 250억원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계시민의 일원으로 앞으로 어떻게 돈을 벌고 써야 할 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흔히들 우리들도 부자들 보면 세금 잘 내고 좋은 일 많이 하라고 하잖아요.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면 이제 주위를 둘러보고 함께 잘 살아 보자는 여유와 봉사 정신이 필요할 때인 것 같습니다.)  





말 탄 꼬마가 늠름해 보입니다. 이들은 황야를 달리는 멋진 삶을 살아 갈 수도 있겠지만 근대화의 혜택에서 벗어났기에 자연과의 힘겨운 사투에서 패배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의학적으로만 봐도 지나친 육식으로 인해 영양이 불균형적이고(비타민 부족) 지나친 음주로 간도 쉽게 상하고 결핵같은 후진국 병도 만연해 있다고 합니다.

노마드(유목민) 역사의 화려함 뒤에는 근대화의 혜택에서 벗어난 우울함도 크다는 뜻입니다.





울란바토르로 돌아가는 길에 한 아이가 나와 손을 흔들어 줍니다. 언제 다시 올지는 기약 할 수는 없지만, 저 역시도 박혜선 님처럼 꼭 한번 다시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그 분의 바람대로 근시일 내에 ‘온수 시설’ 갖춰질 수 있을 지도 궁금하고 다 쓰러져가는 낡은 건물이 새 건물로 바뀌어 있을 지도 궁금해졌습니다. 그 역사에 한국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도 적어 봅니다.

PS : 혹시 이곳의 연락처가 궁금하신 분을 위해

코이카 몽골사무소 김항주 소장 메일주소(hs6245@koica.go.kr)를 살짝 남겨 봅니다.

울란바타르=도깨비뉴스 리포터 호자이 hojai74@gmail.com
Бичсэн: enkhjin | цаг: 2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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болж өгвөл Гадаад хэлээр бичлэг оруулахгүй байхыг хүсье. Бичсэн тохиолдолд тэр болгон хүмүүс унших боломжгүй учир. найздаа эсвэл өөртөө зориулж бичнэ үү.
Бичсэн: xvv цаг: 13:37, 2007-05-16 | Холбоо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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